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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넉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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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_(@syhan55)2011-11-06 04:45:57
벽송사 가는 길로 정령치에서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길보다 수월하다. 비에 젖은 단풍색은 더욱 선명하고, 흰구름 걸린 봉우리와 계곡은 무산같다.길은 겉핥기로 보기에 딱 맞도록 잘 딱여 있다.산을 완상한답시고 일부러 천천히 길을 내려 가고, 멈추어 서기도 하건만, 문득 원숭이 노름같단 생각이 든다. 허튼 짓이로고. 허욕과 名利를 떨쳐버리지 않는 한, 심심유곡에 엎드려 산들 다를 바 있으랴. 허튼 마음 버리려고, 산엘 왔다가 번잡스런 생각에 어지럽게 한나절 헤매다 산내로 내려왔다.
옛날엔 징검다리로 건넜노라는 내를 건너, 실상사엘 갔다. 별스런 꾸밈없이 조용한 옛 절이 조촐하다. 그러나, 이런 고졸한 느낌도 오래갈 것 같지 않다. 지난 여름, 근 이십년만에 다시 가 본 금강산 건봉사 꼴이 되지 않을까. 戰禍로 총알자국이 쑹쑹 난 비석과 주춧돌만 남아 있긴 하였으나 높은 산중턱 부터 아래까지 넓게 펼쳐진 절터는, 수천명의 중들이 있었다는 기록을 앨써 더듬어 보지 않아도, 能히 짐작하고도 남을만큼, 황량하지 않고 얼마나 크고 넉넉해보였던가, 민통선 안에 있는 그 먼 곳, 찾는 이 없는 그 곳을 이틀을 연하여 가기도 하였더라만. 때로 달빛에 젖은 그 절터를 머리속으로 그려보기라도 하면 숨이 막힐듯 했다. 산으로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닐진대, 절로 가는 길부터 새롭게 시원하게 뚫렸더니, 어떤 이름으로든 허울 좋게 붙인이름 아래, 홀랑 드러난 절모습은 범을 그리랴다 괭이도 못그린 꼴이더라. 정말 아니 감만 못하였다. 얼마전에 중창불사를한다는 기공식(?)이라든가를 치뤘다는 내용을 플랭카드에 써서 실상사 절 입구에 걸어놓았으니, 얼마가지 않아 생경스런 여러 구조물들로 꽁꽁 채워진 모습이 미리 보인다.
'비우면 넉넉해진다.'
실상사 뒷간 벽에 붙어 있던 글이던가.
길은 옆을 돌아봄도 없이 더 멀리 더 빨리 가기만 하려고 앞으로 숭숭 뚫리고, 빈 곳은 시간을 잊고 하늘 보며 기대고 누울 틈 송곳 하나 박을 만큼도 없이 채우기만 하려 한다.각박하고 허허로운 인생!
꽉 찬 큰 마음보다 바늘 구멍만한 빈 데가 있는 작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할 텐데, 더욱 쉬운 일은 아닌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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